하늘은 까맸고 우리 손은 빨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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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9.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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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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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까맸고 우리 손은 빨갰다


["스페셜이 무슨 뜻이니?"]

어느 날 식당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신 엄마가 내게 물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페셜? 특별하다는 뜻이지. 엄만 그것도 몰라?"라고 되물었다.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얘기해준 단어의 뜻을 속으로 되뇌는 듯 했다.

"근데 그 뜻은 왜?" 나는 궁금해졌다. 엄마의 얘기인즉슨, 저녁마다 우리 식당에서 밥을 먹는 근처 회사 청년들이 그날 식사를 마치고 식당문을 나서면서 "아줌마 내일 저녁은 스페셜하게 해주세요~!"하고 돌아갔단다.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랐던 엄마는 일단 알겠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 엄마의 짧은 학력이 떠올랐다. 엄마가 받은 졸업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라고 했다. 태어나던 해에 여읜 아버지와 세 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 손에서 엄마는 자랐다. 학창시절에는 국어와 영어를 특히 좋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중학교를 마친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할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그렇게 집안 살림에 힘을 보태며 남은 십대를 보냈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우연한 소개로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삼남매를 낳아 길러온 세월동안 그녀의 삶에는 단 한 번도 쉬어갈 만한 짧은 중턱이나 쉼표가 없었다. 끝없이 이어진 가파른 산비탈을 그녀는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학창시절에 미처 다 배우지 못한 학업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엄마는 나를 무척 엄하게 가르치셨다.

또래들은 밖에 나가 놀기 바쁜 그 시절 시골마을에서 나는 네다섯살 무렵부터 엄마에게 한글을 배웠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동네방네로 열심히 쏘다니긴 했지만 그 시절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글공부였던 것. 엄마의 교육방식은 매우 엄격해서 기역, 니은을 제대로 외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날에는 어김없이 엄한 얼굴로 회초리를 꺼내 드셨고 그럴 때마다 난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바닥을 내밀곤 했다. 더불어 엄마는 나의 옷매무새나 평소 행실에도 무척 신경을 쓰셨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유년시절 하얀 고무신을 주로 신고 마을을 활보했는데 이상하게도 고무신의 오른신과 왼신을 바꿔서 반대로 신거나 뒷굽을 구겨 신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호랑이 같은 얼굴과 추상같은 목소리로 내게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이렇듯 어린 내 눈에 비친 우리엄마는 언제나 엄격한 철인이자 씩씩한 여장부였다.

그런 엄마가 처음으로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훌쩍 넘은 대학생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돌이켜 보면 엄마의 울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평소 엄마는 눈물이 잦았지만 우는 일은 없었다. 눈물샘 폐쇄증으로 찬바람만 맞아도 눈물을 흘리고 슬픈 드라마나 다큐를 봐도 곧잘 눈물을 훔치는 엄마였지만 자신의 일로, 그러니까 스스로를 위해 우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 엄마의 눈물은 익숙했지만 엄마의 울음은 낯설었다. 사실 엄마는 아팠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10년이 넘게 작은 밥집을 운영하면서 누구 못지않게 고된 삶을 살아온 당신의 삶은, 몸속 곳곳에 치유하기 힘든 병마를 빛바랜 훈장처럼 안겨주었다. 고혈압과 당뇨, 그리고 척추관 협착증까지. 식당일을 마치고 근처 병원에서 통증이 지독한 신경주사를 맞기 위해 홀로 발걸음을 옮기던 엄마의 외로움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족들을 위해 한몸 부서져라 살아온 엄마의 60여년 인생 끝에 남겨진 것은, 이런 것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엄마였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누구도 엄마의 아픔을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에게 엄마는 철인이었고, 아파서는 안 되는 버팀목이었으며, 설혹 아프더라도 금방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아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분명 그 누구보다 아팠지만, 그래서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울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엄마는 다행히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며칠 후 어떤 저녁, 갑작스레 눈의 이상을 호소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나와 아버지에게 부엌에 있던 엄마는 자꾸, 눈이 이상하다고 했다. 주변의 사물이 일그러져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 형상이 일그러져 징그럽게 보인다고도 했고 한쪽 눈이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에게 갑작스레 닥친 이 상황이 황당하고 기가 찬 듯, 어이없는 헛웃음을 보이던 엄마는, 그러나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생전 처음 보는 굵은 눈물방울을 양 볼에 뚝뚝 흘리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섭다고 했다. 엄마는, 너무 무섭다고 했다. 마치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눈이 갑자기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이제 어떡하냐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서럽도록 쏟아내며 무섭다고만 했다. 그렇게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남들에게 나쁜 짓 한번 해본 일 없이 평생을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무던히도 고생스럽게 살아온 삶의 결과물 치고는.. 너무나도 잔인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엄마가, 나의 엄마가 아닌 한명의 여자로 보였다.

다음날 병원에서 안과의사는 말했다. 고혈압으로 인해 눈의 시신경과 연결된 실핏줄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고.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실명으로 이어질 뻔 했다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한 후 천만다행으로 엄마의 눈은 다시 정상으로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눈은 무사히 회복됐지만, 그녀의 우는 모습은 나의 뇌리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엄마도 울 수 있다는 걸, 우리 엄마도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한 여자라는 사실을, 스물이 훌쩍 넘은 그때서야 처음으로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채로 엉엉 울음을 터뜨리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생전 처음으로 내가 이 여자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껏, 2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방적으로 나를 뒷바라지하며 보살펴준 이 여자를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처음으로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해 직장생활을 시작한 어느 여름날의 저녁, 식당일을 그만둔 엄마와 단둘이 저녁 운동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저녁 운동이래봤자, 동네 천변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게 전부였지만 엄마를 그렇게라도 운동시키고 싶은 마음에 그날따라 얼른 나가자고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막상 나가보니 날씨는 흐렸고 생각보다 바람은 썰렁했다. 천변 산책로를 한참을 걸어 힘들게 반환점을 돌 무렵, 갑작스레 밤하늘이 우르렁거리며 비가 툭툭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어찌할 새도 없이 흠뻑 젖은 우리는 일단 근처 다리 밑에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리 밑 둔덕에 걸터앉은 채로 한참을 지켜봤지만 빗줄기는 그칠 요량이 없어보였다. 바람은 쌀쌀했고 날은 부쩍 어둑어둑해져갔다.

["엄마, 어차피 쫄딱 다 젖었는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 그냥 얼른 걸어가자. 이러다 우리 감기 걸리겠어."]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렇게 빗속을 뚫고 걷기로 한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비바람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앞서 걷던 엄마의 왜소한 뒷모습에서 문득 굳은살이 밴 채로 주름진 작은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새삼 엄마의 손이 이렇게 작았나 싶기도 했고 어린 시절 이후로 엄마의 손을 잡아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 순간,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큰맘 먹고 용기를 내어 슬며시 엄마의 손을 잡았다. 날은 쌀쌀했지만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로 우린 또 한참을 말없이 비바람 속을 걷기만 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비는 잦아들고 한결 걸을 만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숨이 찬 우리는 다시 빗발이 거세질 기미가 보이자 눈에 보이는 다리 밑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비에 젖은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부채질하듯 옷의 물기를 털어내던 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가 그때.. 나 고등학교 때 말야, 나한테 스페셜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던 거 기억나?"]

엄마는 뜬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갑자기 그건 왜?"라고 물었다.

["아니, 그때.. 내가 그 뜻을 제대로 못 알려준 거 같애서."]

["무슨 뜻?"]

["스페셜 있잖아. 그.. 스페셜을 정확히 얘기하면.. 나한테 엄마 같은 사람을 뜻하는 그런 의미거든."]

​빗속에서 엄마는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민망해진 나는 순간, 엄마의 눈을 피해 천변을 향해 어색하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니깐.. 아, 뭐라 해야 되지.. 그니깐, 나중에 엄마가 더 나이 들어서 자꾸 신발을 짝짝이로 신거나 그러면 내가 구박하면서 신발을 제대로 신겨주겠다는 그런 뜻이고, 글씨 쓸 때 맞춤법을 자꾸만 틀리고 그러면 내가 국어 전공이니깐 스파르타식으로 눈물콧물 쏙 빼게 혼내면서 한글을 야무지게 가르쳐주겠다는 뜻이고.. 어, 그리고 또.. 눈이 침침해져서 혹시라도 글씨를 엉뚱하게 잘 못 읽거나 그러면, '벌써 이런 것도 못 읽어서 어떡하냐'구 혀를 쯧쯧 차면서 꼬박꼬박 옆에서 내가 대신 읽어주겠다는 그런 뜻이라구. 그게 스페셜이야.. 엄마."]

두서없이 긴 설명을 마친 나는 한쪽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엄마의 반문에 순간 당황한 나는, 마음 속 깊이 담아둔 말이 떠오르는 대로 그냥 뱉어냈다.

["아니 그니까.. 엄마가 이담에 나이 들어도, 내가 지켜준다구."]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무슨 대단한 프로포즈(?)라도 성공시킨 남자라도 되는 것 마냥 뿌듯한 마음에 사로잡힌 나는 딴청을 피우는 척 짐짓 표정관리를 하며, 감동에 푹 젖었을 엄마의 수줍은 반응을 기다렸다. 엄마는 이내 말했다.

["어이구? 하여튼 맨날 그놈의 입만 살아서.. 됐으니까 니 앞가림이나 잘해 이놈아~"]

(....)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비에 젖은 엄마의 손은 내 손을 더 꼭 끌어 쥐었다.


["잘해준대두 난리야 엄만!"]

["어련하실까~ 알았으니까 혼자 지지리 궁상 그만 떨고 얼른 좋은 짝 만나서 결혼할 생각이나 하셔요~ 엄마한텐 그게 제일루 효도야! 알어?"]

["아 또! 여기서 결혼 얘기가 왜 나와~!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한대니깐~ 하여튼 우리 집안은 이래서 대화가 안돼, 대화가!"]

["뭐가 어째, 이놈아?"]

["뭐! 내가 틀린 말 했수-_-?"]

["얼씨구?"]

그렇게 다리 밑에서 한참을 투닥거리던 우리는 생쥐처럼 비에 젖은 채로 열을 올리던 서로의 몰골을 바라보고선 이내 픽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빗속에서의 투닥거림으로 시간을 보내던 사이 어느덧 점차 잦아든 빗방울은 이제 일어설 시간임을 알려주었다. 이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서 씻자며 끝까지 무뚝뚝하게 퉁을 놓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엄마의 말과는 달리 엄마의 따뜻한 손은, 더 말하지 않아도 니 맘을 다 안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날의 대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한 사람을 향한 내 인생의 첫 번째 프로포즈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빗속을 걷다보니 문득 이렇게 흐뭇하고 상쾌하게 비를 맞아보는 게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빗발이 잦아들든, 세차게 내리든 이미 젖을 대로 홀딱 젖어버린 우리는 밤하늘의 질투와 심술에 상관없이 손을 꼭 잡은 채로 한결 여유 있는 발걸음을 떼었다. 하늘은 까맸고 우리 손은 빨갰다. 정말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밤이었다. 

 

 

피지알 펌

원글링크 :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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